애인을 데려다주며 집에 가는 길에 승룡형을 봤다. 수서와 후암동만 오갈 형을 강남에서 보다니 마치 전설의 포켓몬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으로 냅다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울리던 통화음이 갑자기 꺼지고 수화기 넘어로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 너 나를 봤구나. 어디냐?"
밤공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푹푹 찔 때가 언제였냐는 듯 웬일로 바람도 불고 날이 선선했다. 덕분에 형과 강남역 길 한복판에 있는 잔디밭에 덮썩 드러누웠다. 한달 가량 전에 갤러리에서 첫 전시 오프닝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형이었다. 갤러리를 정리하고, 작업실을 빼고, 자신의 작품을 구매해준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내는 등 많은 정리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곧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깊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제는 취향이었다. 사실 '취향'은 내가 근래 빠져있는 주제다. "AI 시대에는 취향이 더 중요해질 거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딱히 개연성 있어 보이진 않아 납득이 어려웠고,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이 부분에 대해 그닥 부연설명하지 않더라. 샘 알트먼이나 일론 머스크, 노션의 이반 자오 같은 사람들이 'taste'라는 단어를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그냥 그들의 말을 따라하는 것 뿐인 건 아닌가 하는 킹리적 갓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더라. 요약하자면, 취향은 내 선호가 담긴 '내가 하고 싶은 것'이고, taste는 '주어진 맥락에서 더 좋은 것을 골라낼 수 있는 안목'이다. Taste는 '손으로 만져서 살피다'라는 라틴어 taxare에서 비롯했다. 이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는 '직접 경험해보고 판단한다'에 있다. 그래서 맛은 경험을 위한 하나의 채널이 되고, 실제로 영어권에서도 taste는 단순히 개개인이 좋아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을 식별해내는 안목'을 말한다.
취향과 taste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빠르게 확장됐다. 좋은 안목이란 건 무엇인지, 개인이 가진 안목과 그 기저의 기준들은 어떻게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 맞는지, 그리고 취향과 안목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100%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도록 뻗어나가는 인생을 '낭만의 줄기'라고 이름지었던 형의 전시와도 접점이 많았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건 형이 말해준 '개미와 배짱이'에 대한 비유였다. 형에 의하면, 배짱이는 본인만의 취향을 가진 존재다. 만약 개미가 배짱이를 따라한다고 하면 할 수 있을까? 개미는 갑자기 주어지는 무지막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우화는 배짱이보다 개미의 태도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위험할 수 있다.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되었다는 말이다. 특히나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이제는 개미가 정답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틱톡 라이브에는 전세계 사람들이 컨텐츠를 라이브로 송출한다. 걔중 아프리카인들은 과거에 아프리카 BJ들이 했던 것처럼 후원에 대해 리액션하는 방송을 한다고 한다. 형은 자신의 친구가 그 방송에 1.5만원을 후원하면서 자기 이름을 크게 불러달라고 하는 영상을 보여줬다. 후원 알림을 본 아프리카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연신 절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프리카 큰 손이라는 사람들은 이런 기분일까? 뭐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하루종일 노동을 할 때 그 아프리카인들은 리액션 몇 번으로 마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해서 노동만이 중요한 가치라고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이 정답은 아니지만 (그들이 본인들의 수준높은 취향에 맞는 활동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아니겠지만) 어떤 경제활동을 선택하든 굶어죽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우리가 내심 기대하는 부와 명예와 성공이 모두 개인적이고 표면적인 욕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그 취향에 몰입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활동을 통해 살아갈 수 있다면 단순하게 그게 행복이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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